[2024 겨울 자몽 시리즈: 과거에서 날아온 자연과학 수업!] 면역학이 걸어온 길 - 보이지 않는 적에서 공존의 과학으로
자연대 홍보기자단 자:몽 5기 | 신민영
과학은 단순히 새로운 발견들이 연속적으로 쌓여가는 선형적인 발전의 산물이 아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이 제시한 패러다임 이론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한 시대의 공통된 전제와 이해방식을 공유하며 연구를 진행하고, 이러한 전제가 누적된 모순이나 변칙적 사례가 발견될 때 기존의 사고 체계가 급격하게 전환된다. 이와 같이 과학은 불연속적인 도약, 즉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발전해 왔다.
면역학의 발전 과정 역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초기의 질병 원인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현대 면역학의 복합적인 이해에 이르기까지, 면역학은 끊임없는 패러다임 전환을 거쳐왔다.
질병의 원인에 대한 이해: 종교적 해석, 미아스마, 그리고 세균 이론까지
오래전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질병은 초월적 존재의 징벌이나 신의 노여움의 결과로 여겨졌다. 군주의 부덕이나 공동체의 도덕적 타락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질병의 발생을 도덕적 책임과 연결시키는 문화적 배경을 형성했다. 이러한 종교적 해석은 중세 유럽과 같은 사회에서 특히 강력하게 작용했고 질병의 확산을 사회적, 도덕적 타락의 결과로 보는 시각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차 경험적 관찰을 통해 질병의 전파 양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지역이나 부패한 시체 근처에서 질병이 빠르게 확산되는 현상을 관찰하고, 미아스마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은 "나쁜 공기(miasma)"가 질병을 일으킨다고 주장했으며,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널리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말라리아(malaria)라는 질병 이름도 이탈리아어로 '나쁜 공기(mala aria)'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미아스마 이론이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질병 인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종교적 해석과 미아스마 이론은 오랫동안 공존했다. 예를 들어,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하는 한편, 도시의 오염된 공기와 환경이 질병을 확산시킨다는 인식도 확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위생 환경 개선과 같은 실질적 대응에 기여했지만,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여전히 부족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이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국의 의사 존 스노우(John Snow)는 1854년 콜레라가 공기뿐만 아니라 오염된 물을 통해서도 전파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런던의 브로드 스트리트 펌프에서 채취한 오염된 물이 감염의 근원임을 추적하고, 해당 펌프의 사용을 중단시킴으로써 콜레라의 감염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비슷한 시기, 헝가리의 산부인과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는 산욕열로 사망하는 산모들이 부검한 시신을 만진 의사에게 진찰받은 후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통해 질병이 접촉을 통해서도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의사들의 손 씻기로 산모의 사망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접촉을 통해 질병이 전파되는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당시 의료계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미생물이라는 세균 이론은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와 독일의 로버트 코흐(Robert Koch)에 의해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파스퇴르는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미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으며, 부패와 발효 또한 미생물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열을 가해 미생물을 제거하는 저온살균법(파스퇴르 살균법)을 개발하고, 약화된 병원체를 이용한 백신을 만들어 인공 면역을 유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버트 코흐는 특정 미생물이 특정 질병을 일으킨다는 코흐의 가설(Koch's Postulates)을 확립하며 세균 이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탄저균, 결핵균, 콜레라균 등을 발견하고, 병원체를 순수 배양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감염병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로써 질병의 원인이 미생물이라는 개념이 확립되었고, 면역학은 병원체에 대한 방어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학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파스퇴르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
면역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전쟁에서 균형으로
세균 이론이 확립된 초기에는 면역계가 외부 병원체와 싸우는 단순한 방어 체계로만 이해되었다. 병원체는 신체의 적으로 간주되었으며, 면역계는 인체를 보호하는 '방어선'으로서 병원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 핵심 역할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면역계의 역할에 대한 기존 인식을 뒤흔드는 새로운 발견들이 이어졌다.

1902년, 프랑스의 생리학자 샤를 리셰(Charles Richet)와 폴 포르티에(Paul Portier)는 해파리 독소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병원체가 아닌 외부 물질에 대해서도 면역계가 과도하게 반응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은 이러한 면역 반응을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라고 명명했다. 1906년에는 클레멘스 폰 피르케(Clemens von Pirquet)가 해롭지 않은 물질에도 면역계가 과도하게 반응하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알러지(allergy)'라고 정의했다. 이는 면역계가 단순히 병원체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해한 물질에도 면역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발견이었다.
비슷한 시기, 카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는 혈액형을 발견하고, 서로 다른 혈액형 간의 수혈 시 면역계가 이를 외부 물질로 인식해 공격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또한 장기이식 시 같은 종의 같은 조직이더라도 거부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을 통해, 면역계가 자신의 조직과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다는 이해가 확대되었다. 20세기 중반, 프랭크 번넷(Frank Burnet)은 면역계가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를 구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비자기에 대해 면역반응이 활성화된다는 개념을 체계화했다. 이는 면역 반응의 메커니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열었으며, 자가면역 질환의 연구에도 이바지했다.
한편, 1907년 일리야 메치니코프(Ilya Mechnikoff)는 기존에 모든 미생물이 해롭다는 관점을 뒤엎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특정 미생물이 인체에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며, 장내 유산균과 같은 미생물이 건강을 증진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 '프로바이오틱스'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즉, 면역계는 단순히 모든 외부 침입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미생물과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 후반, 데이비드 스트래컨(David Strachan)은 현대 사회의 위생 수준 향상이 오히려 면역계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위생 가설(hygiene hypothesis)을 제시했다. 그는 어린 시절 다양한 미생물에 노출되지 않으면 면역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의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면역계 발달과 환경적 요인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발견들은 면역계를 단순히 외부 침입자와의 전투 수단으로만 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인체와 미생물이 균형을 이루며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생태계로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현대 면역학은 단순히 병원체에 대한 방어 메커니즘 연구를 넘어서, 인체 내부와 외부 환경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다층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질병 예방과 치료뿐 아니라, 인간의 전반적인 건강 유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계속된다
면역학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보면, 질병의 원인을 초월적 요인이나 미아스마라는 개념을 통해 해석하던 초기 인식에서 벗어나, 미생물이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밝힌 세균 이론이 등장하며 과학적 기반이 확립되었다. 이후 면역계는 외부 병원체와의 단순한 전쟁을 넘어서, 인체 내부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복합적인 생태계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 패러다임이 새로운 발견에 의해 전환되며, 과학이 비선형적으로 발전해 온 과정을 잘 보여준다.
지금 정설로 여겨지는 것도 언젠가는 새로운 발견에 의해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면역학을 비롯한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기존 지식을 재구성하고 인간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심화시킬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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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대학 홍보기자단 자:몽 신민영 기자 snu_cla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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