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에서 식물분류학의 개척자로: 故 정영호 교수의 삶과 유산
자연대 홍보기자단 자:몽 7기 | 이시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봤을 자연대 대형강의동(28동). 이곳의 2층 공터 한쪽 벽면에는 ‘자연대 기부자 명예의 전당’ 디스플레이가 마련되어 있다. 이 기사에서는 자연과학대학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후원을 제공한 수많은 기부자들 중,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식물분류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故 정영호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식물학과 교수의 생애를 다루고자 한다.
1994년 세상을 떠난 故 정영호 교수의 업적을 생생히 전하기 위해, 특별히 그의 대학원생 제자였던 최홍근 아주대학교 명예 교수와 차남 정재훈 카이스트 명예 교수가 도움을 주셨다. 두 분과 진행한 서면 인터뷰를 통해 사료만으로 부족한 내용을 채울 수 있었다.

故 정영호 교수의 모습. (사진 =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제공)
독립운동가에서 식물학자로, 후대에 수많은 업적과 유산, 가르침을 남긴 故 정영호 교수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일제 강점기, 타지로의 이주
정영호 교수(호 운초)는 1924년 8월 19일, 평안남도 평양 기림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창시절 신의주 제1공립 보통학교에서 수학 후 중국으로 건너가 1942년 중화민국 남경국립중앙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남경국립중앙대학교(현 남경대학; 南京大学) 이학원 생물학계를 수료하였다.
그의 제자였던 최홍근 교수가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생물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부친의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故 정영호 교수의 부친 정봉주는 숭실전문대학에 다녔는데, 이 곳은 나비박사로 유명한 석주명도 재학한 학교이며 정봉주가 5년 선배였다. 이병철 작가의 «나비박사 석주명 평전(1985)»에 따르면, 당시 석주명에 대한 이야기를 정봉주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최홍근 교수는 정영호 교수의 부친과 석주명 간 인연이 있었기에, 정영호 교수 역시 1930-40년대 나비연구로 국내외에 유명해진 석주명 박사의 명성을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전했다. 또한 석주명 박사와 정영호 교수는 해방 후 국립과학박물관에 같이 근무한 기록이 있다.
청년 광복군의 삶
故 정영호 교수는 남경국립중앙대학교(이하 남경대학) 재학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활약했다(1942~1946). 남경대학은 한국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유학을 와 독립운동을 펼친 역사가 깃든 곳이다. 당시 남경대학에는 정영호 교수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유학생이자 이후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신영묵이 주도하여 결성한 조선인 비밀결사 단체, 한족동맹(韓族同盟)¹이 있었다. 이곳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꾸준히 지하 공작활동²을 전개했는데, 1943년 12월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발각되자 많은 학생들이 남경대학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했다. 정영호 교수도 마찬가지로 이때 남경대학을 빠져나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에 입대하게 된다. 그는 광복군에서 한교(韓僑)전지공작원으로서 일본군 동향 파악, 초모 공작 등의 임무를 맡았는데 일선지구를 돌아 다니며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들을 끌어내와 광복군에 편입시키도 했고, 탈출해 숨어있던 한국인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중화민국 제3전구 제1정진유격종대 사령부 대일책반 공작대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1) , 2) 신영묵이 남경대학 재학 중 중국 국민당 특파원 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공작원 김병호와 접선하여 송지영, 이일범, 조일문 등과 함께 결성한 단체. 한인 학생들을 규합하는 한편 일본군으로 활동하던 한국인들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귀순하고자 하는 자들을 탈출시키고, 관내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지하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정영호 교수의 공훈을 기리는 의미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그렇다면 그가 열여덟, 열아홉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의 투지를 다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정재훈 교수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정영호 교수의 전 가족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에 체류했다고 한다. 그의 부친 정봉주 역시 독립유공자였다. 정재훈 교수는 “조선에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떠난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하는 것은, 시대 상황으로 볼 때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였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재훈 교수: “상마살적 장막독서(악비; 말을 타면 적을 베고 군막에 들면 책을 본다)라고, 이는 당대의 유교적 이념에 부합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학신문(1978.9.4일자)에 실린 정영호 교수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가 어린시절 공부한 신의주는 독립운동가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는데, 그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도 한다.
식물학자로서의 생애
광복 이후 정영호 교수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 입학 당시에는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전쟁 당시의 출혈 트라우마가 남아있어 1946년 9월, 문리과대학에 생물학과가 설치된 후 이곳으로 전과했다. 이후 그는 식물분류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가 식물분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광복군으로서의 경험과 관련이 깊다. 최홍근 교수는 스승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최홍근 교수: “정영호 선생님께 독립운동 하시다가 어떻게 생물학 중에서도 식물학을 연구하시게 되었는가 하고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주로 도보로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깊은 산 속에서 야영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중국의 여러 산을 다니면서 자연의 오묘함과 생물다양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영호 교수는 1950년 서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6.25가 발발하자 사변 전후로 울릉도와 독도, 남해와 서해 도서의 식물조사를 많이 다녔다. 이 과정에서 당시 식물분류학의 태두였던 정태현 박사를 사사하여 그는 1970년 서울대학교 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51년에서 1953년까지 진주농과대학 전임강사 및 조교수로, 1953년에서 1989년까지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식물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식물학자로서 그는 우리나라 식물분류학 분야의 연구 기틀을 세우고, 고유 식물 종속지를 집대성하는 등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널리 존경받는다. 교직에 있으면서 38년간 꾸준히 관속식물, 식물성플랑크톤 분류학 등 식물분류학 분야 연구를 지속했으며 한국 관속식물과 담수조류에 대한 180여편의 논문 및 저서를 출간했다. 아래는 그의 제자 최홍근 교수가 식물학자로서 스승의 업적에 대해 기자에게 들려준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식물상을 밝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관속식물³상 연구는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우리나라 연구자에 의한 연구는 매우 단편적이고 제한적이었다. 해방 이후 정영호 교수는 우리나라 식물상을 밝히기 위해 울릉도와 독도, 가거도 등과 같은 섬들을 비롯하여 제주도, 설악산, 지리산 등 식물상이 풍부한 산악지대를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전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지역의 새로운 식물상과 미기록종이 학계에 보고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그의 저서 «한국식물분류학사개설(1986)»으로 집대성되었다.
3) 관다발을 가진 식물. 양치식물, 겉씨식물, 속씨식물이 포함된다.(국립생물자원관, 한국의 식물)
그는 또한 1960년대 당시 국내에서 개척되지 않은 분야인 담수플랑크톤 연구에 앞장서며 우리나라 강과 호수에서 발견되는 담수 조류의 다양성을 밝혔다. 1968년 출간된 «한국동식물도감(담수조류편)»에는 1000여종의 관련 자료가 상세히 담겨있다.
그의 업적은 개인적인 연구 성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정영호 교수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식물로 알려진 고유식물들을 발굴하여 이에 대한 종속지적 연구를 수행하였는데, 많은 관련 제자들 또한 배출했다. 이때 배출된 제자들은 이후 각 대학의 교수가 되어 우리나라 담수생물학과 식물분류학 연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1980년부터 정영호 교수의 종속지적 연구는 우리나라 식물상의 분포를 확인함과 동시에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각 식물종들이 어떠한 계통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는 생물지리학적, 구계⁴학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식물의 고유성을 확인하고 식물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고, 다수의 신종과 신변종을 발견하게 되었다. 종속지적 연구의 예로써 ‘한국의 참물부추(정영호·최홍근, <한국 물부추의 신종: 참물부추(Isoetes coreana)>, 1986))’ 발표는 일제 시대에 잘못 알려진 우리나라 식물의 이름을 바로잡고, 국제적인 신종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였다. 물부추속(Isoetes)은 물속에 사는 양치식물로서 일제시대에 경기도 평택에서 발견되어 당시에 ‘물부추(Isoetes japonica)’로 보고되었으나, 1984년에 경기도 화천 북한 강변에서 다시 발견되어 연구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신종(new species)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4) 식물구계(Floristics): 지리학적 범주로 나누어진 식물의 분포지역. (대한민국 국가지도집, 식물구계 및 식물구계학적 특정 식물)
훗날 출판된 «아름다운 식물 이야기(2005)»에는 그가 직접 현장을 다니며 조사하고 연구한 우리나라 고산식물과 천연기념물, 숲과 나무 등 고유 식물상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도 열람 가능하다.
극일(克日) 정신
정영호 교수는 그가 광복군 시절 지녔던 극일(克日; over Japanese; 일본을 이기자) 정신을 학문적 연구에서도 이어갔다. 관련 일화로, 최홍근 교수는 스승과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신종으로서의 물부추를 밝혔을 때, “이 또한 극일의 한 업적으로 생각하여 매우 기뻐하셨고, 서울대 식물학과에서 은퇴하실 때에 동료교수님들이 이를 기념하는 선물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제자들이 기억하는 스승의 모습
정영호 교수는 학자로서 여러 학문적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큰 힘을 쏟았다. 최홍근 교수는 스승으로서 정영호 교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최홍근 교수: “우리들은 1970년대 이후에 정영호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게 되었습니다. 학부 시절에 본 선생님은 짙은 눈썹의 호남형 얼굴이셨는데, 형형한 눈빛에 말씀이 적으셔서 위엄이 넘치는 인상이었습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말씀은 많이 하지 않으셨지만, ‘말을 타면 창을 들고 막사에 들면 책을 본다’는 정신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셨습니다. 이는 중국에서 독립운동하시면서 일제와 싸움과 동시에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 지녔던, 문무겸전의 기상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비록 제자들에게 매우 엄하기는 하셨지만 우리들에게 개인적인 일은 하나도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선생님의 가방을 들어드리는 것도 막으셨습니다. 이렇게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선생님 연구실의 제자들에게도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생물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 및 여러 언어에도 조예가 깊었다. 중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독립 운동을 했던 덕분에 한자와 중국어, 일어는 물론이고 영어, 독일어, 심지어 러시아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최홍근 교수: “식물분류학은 학문적인 내용 외에도 영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심지어는 러시아 문헌까지 읽어야 하기 때문에 언어 장벽이 높은 분야입니다. 다양한 언어로 된 식물 분류학 문헌을 읽을 때, 식물 이름이나 지명 또한 여러 나라 말로 되어 있어 해독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정영호 선생님은 한자와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외국어에도 능통하셔서 우리들이 많이 부러워하였습니다.”
한문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제자들에게 한시를 자주 소개했고 서예 및 서화가, 전각하는 사람들과도 다방면으로 교류했으며 말년에는 투고 활동도 많이 하였다. 제자들에게는 '木以不材 保其千年'⁵ 이라는 전각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은퇴 후에는 ‘여씨춘추’를 완역하는 등 인문학에 대한 열정도 이어갔다.
5) 목이부재 보기천년: ‘나무는 재목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수명이 천 년을 보존한다’.
정영호 교수는 후학 양성 외의 측면에서도 학생들을 열성적으로 지도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산악반과 사격반을 창설했는데, 특히 산악반의 경우 훗날 설악산 빙벽, 남미와 알래스카 고봉을 각각 등반하는 등 많은 성과를 냈다. 파미르 고원을 탐사하는 등 문리과대학 산악반 OB들의 활동도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산악회 만큼은 활동적이지 못했지만, 서울대 사격반도 자연대를 중심으로 상당한 활동을 하였다.
아름다운 마음, 자연보호와 자연교육
식물분류학을 연구한 정영호 교수는 그의 주요 연구 배경이 자연이었던 만큼, 자연 보호에도 관심이 깊었다. 자연보호중앙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자연보호운동에도 큰 힘을 쏟았는데, 정재훈 교수에 따르면 그는 “preservation of extant species”를 위해 앞장섰다. 현존하는 생물 종을 보존하자는 것인데, 1970년대 국가개발정책이 시행되면서 국가의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최소화 하기 위한 초석을 닦았다. 또한 자연학습원시설 지정과 자연보호헌장 제정에 참여하였고, 자연보호중앙협의회와 자연보존협회를 통한 생물다양성의 중요성을 알리는 많는 기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저술 활동으로 한번 파괴된 자연은 결코 회복될 수 없고, ‘현재의 자연은 우리가 미래의 후손들로부터 빌려서 쓰고 있는 것이다’는 철학을 설파했다.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소중한 자연 자원을 보호하는 일은, 비단 이 지역에 국한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바로 지금 우리 세대가 살고 있는 자연이 곧 우리 후손들이 쓸 자원이기도 하며,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식물 이야기(2005)» 中 -
1980년대에는 환경 생태 및 자연보호 관련 학회장을 역임하면서 자연보존 활동에 앞장섰고, 환경청 설립과 환경과학원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자연환경평가기준을 마련하여 전국자연환경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로부터 정부가 발주하는 모든 공사는 이 기준에 따르게 되었다. 훗날 환경청은 정영호 교수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공로 표창을 수여했다.
후대에도 이어지는 참된 기부 정신
故 정영호 교수는 2019년 제29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되었다. 그는 1994년 세상을 떠나기 전 기부에 대한 유언을 남겼고, 유족들은 그 뜻에 따라 서울대 기초학문후원기금 37억 원 출연, 110억 원 유증 등 여러 사회공헌 기부 활동을 이어갔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관정관 1층 운초세미나실 모습. (사진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도 3억원을 쾌척했는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은 이를 기리고자 관정관 1층 세미나실을 故 정영호 교수의 호 운초를 딴 운초세미나실로 명명하였다.
그의 부인인 故 박양숙 여사 역시 생전 남편의 학문적 유지와 ‘기초학문 후학 양성’이라는 뜻을 깊이 헤아려 평생 사비를 아끼지 않고 후원했다. 과학기자재 사업으로 모은 전 재산을 박양숙 여사의 유지에 따라 고려대(100억원), 유니세프(100억원) 및 서울대(110억원)에 기부했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후 진주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던 그녀는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는데, 차남 정재훈 교수는 “어머니는 평상시에도 교육 기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고, 자식들에게도 충분히 투자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전했다.
부모의 기부 철학과 교육에 대한 가치관이 자식에게도 깊은 영향을 준 것일까. 정재훈 교수 역시 자연과학 인재 양성을 위한 박양숙-정영호 기초학문후원기금을 지원하고, 운초 장학금을 신설하는 등 후학 양성을 위한 장학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기부 뿐만 아니라 진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부모의 영향은 지대했는데, 정재훈 교수 역시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카이스트 생명과학과의 명예 교수이다. 그는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버지 정영호 교수에게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정재훈 교수: “제가 1973년 대학에 입학할 당시 한국은 일인당 GDP 300달러 수준의 국가로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도 제 교육환경은 큰 특권이었습니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아버지의 가정교육은 대개 무언으로 이루어졌으나 꽤나 개방적인 편이었습니다. 인간생존에 필요한 지식 정보량이 증가하는 시대에서, 18세 고교생의 진로는 아무래도 전문직 아버지가 큰 영향을 끼쳤겠죠. 아버지께서 1950년대에 번역 출간한 Harold Munro Fox의 Biology 교과서와 Gordon Alexander의 Biology (College Outline)는 제가 생물학으로 진로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재훈 교수: “저는 부계가 평안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입니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다 독실하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와 저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유물론적 자연관은 저에게도 이어졌고, 저도 진화생물학을 강의하면서 강연, 기고등을 통하여 유물론적 입장을 표방했습니다. 이렇게 변화사상을 통해 개별성과 다양성을 인정, 추구함이 옳다는 가치관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값진 가르침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 28동 2층 공터 기부자 명예의 전당 모습. (사진 = 이시아 기자)

서울대학교 2층 디스플레이 기부자 故 정영호, 박양숙. (사진 = 서울대학교 기획대외협력실 제공)
현재 서울대학교 28동 2층에 위치한 ‘자연대 기부자 명예의 전당’에서는 故 정영호 교수, 故 박양숙 여사, 정재훈 교수의 기부 스토리를 살펴볼 수 있다. 정영호 교수의 일대기에서 볼 수 있듯,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장학금과 재정적 지원은 모두 기부자의 훌륭한 업적과 투철한 나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학내의 여러 장학금 관련 공고문을 살펴보면, 이러한 장학금의 취지와 배경은 충분히 소개하지 않은 채 그저 추천 조건만 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제부터라도 수혜자 개개인이 자신이 받는 장학금의 의미와 배경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함께 알리고 기부자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나라와 학문, 그리고 자연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정영호 교수의 삶은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의 역사 속에도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연구와 교육, 그리고 기부로 이어진 발자취는 오늘날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과 가치를 남긴다. 故 정영호 교수께 경의를 표하며, 본 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신 정재훈 교수와 최홍근 교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한다.
참고 문헌
1.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연도미상). 한국의 식물. https://species.nibr.go.kr/home/mainHome.do?cont_link=010&subMenu=010005&contCd=010005002
2. 김치영. (2019.12/30). [김치영의 고전 산책]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없는 것이 때로는 유용하다. 충청매일. https://www.ccd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8696
3. 대학신문. (1978.9.4.).
4. 대한민국 국가지도집. (2020). 식물구계 및 식물구계학적 특정 식물. http://nationalatlas.ngii.go.kr/pages/page_2133.php
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도미상).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신영묵.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8225
6. 박종욱. (연도미상). 정영호 (鄭英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599
7. 서울대학교 도서관 친구들. (2019.10/17). ‘제29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故 정영호 기부자. https://friends.snu.ac.kr/?page_id=131&mod=document&uid=987
8. 정영호. (2005). 아름다운 식물 이야기. 도서출판 우리글.
자연과학대학 홍보기자단 자:몽 이시아 기자 siasia778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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