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로 발전한 안드로이드를 우리는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영화 〈공각기동대〉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을 중심으로
자연대 홍보기자단 자:몽 8기 | 윤종환
0. 들어가며
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신성한 자연대 기사란에 인문? 철학? 이 얼마나 불결한 것인가. 허나 이공학도에게 인문학이란 필수불가결한 학문이다. 연구와 응용 전반에서 윤리적 문제를 다뤄야 하는 현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기술에 대한 윤리적 화두는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더욱 불타오른다. 당장 닥쳐오는 인공지능의 일자리 대체 갈등부터, 먼 미래 인공지능과의 공존 문제까지, 다양한 과제들이 앞에 놓여있다. 이러한 과제들을 순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가는 우리 역시 인문학을 습득해야 한다. 자연대 학생 여러분이 인문학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 〈공각기동대〉와 함께 ‘인류와 안드로이드의 공존’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보고자 하니 아량을 베풀어주길 바란다.
1.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구별이 불가능해진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자. 아주 먼 미래.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외형은 매우 흡사하여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심지어는 감정까지 느낀다. ‘안드로이드를 무엇으로 정의하는가’는 이러한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이들을 단순한 기계로 보아야 할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아예 새로운 ‘생명체’로 취급해야 할까? 우리 사회에서는 안드로이드와 공생할지, 완전히 동화할지, 혹은 배척할지 다양한 주장이 오갈 것이고, 이러한 주장의 뿌리는 결국 안드로이드의 정의에서 비롯된다. 안드로이드를 ‘인격을 지닌 생명체’로 인식한다면 우호적 주장을 할 지도 모를 일이고, ‘그저 고철덩어리’로 본다면 일괄 처분을 주장하기 쉽지 않을까. ‘지적 생명체란 무엇인가?’, ‘인간이 지적 생명체인가?’, ‘인간이 지적 생명체라면 안드로이드는 어떠한가?’, ‘윤리적인 측면에서, 지적 생명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면 대답할 수 없다. 우리가 철학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이다.
2. 지금은 실존주의를 질문에 적용해야 할 때
20세기, 2차 세계대전, 찬란한 과학 문명과 함께 유토피아 건설을 꿈꿨던 인류는 기술의 암면을 여실히 목격했다. 믿었던 인간의 ‘이성’이 무너져 내린 혼란 속에서 인류는 인간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고, 실존주의가 피어났다. 실존주의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인간의 자아와 주체성에 대한 답을 내리는 철학 사조이다. ‘실존’은 철학자마다 그 정의를 다르게 두기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조합해서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주체적으로 선택할 ‘자유’가 존재한다. 이처럼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실존한다’라고 하자. 우리는 선택의 결과에 따라서 덜 주체적으로 될 수도, 더 주체적으로 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실존하지만, 더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사고·행동이 가능할수록 참된 실존에 가까워진다.
이 복잡해 보이는 말을 지금 당장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아를 실존을 통해 설명할 수 있고, 실존 역시 논리적 흐름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를 생명체로 인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에 안성맞춤이다.
3. 〈공각기동대〉와 실존주의
공각기동대(1995)는 ‘자아, 생명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다룬 동명의 만화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사이보그화된 주인공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으로, 당대로선 신선한 주제를 압도적인 영상미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각기동대는 ‘의체’와 ‘전뇌화’가 일반화 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의체란 기계로 된 몸, 전뇌화는 뇌를 전자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뇌를 의체, 그리고 NET(일종의 인터넷)과 연결 가능토록 하는 작업). 전뇌화한 사람들의 자아는 ‘고스트’라 불린다.
실존주의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쿠사나기와 인형사는 실존적인 주체로 해석이 가능하다. 작품 속에서 둘은 각자의 한계상황을 마주하고, 이를 해소하고자 주체적으로 자신이 나아갈 바를 선택한다. 자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는 위험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결국 인형사는 쿠사나기와 접촉에 성공하고, 융합을 시도하기 위해 그녀를 설득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네가 지금의 네 자신으로 있으려는 집착은 너를 제약한다."
자아의 융합은 곧 이전 자아의 소멸을 의미한다. 현재의 모습을 잃게 될까봐 고민하는 쿠사나기에게 인형사가 건넨 이 말은 ‘무엇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작품의 주제를 시사한다. 주체적 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 그들이야말로 참된 실존을 지닌 주체이자, 정말 인간다운 존재가 아닐까.
1) 일종의 선택의 기로이다. 단순히 한계에 도달한 시점 뿐 아니라, 시련, 고뇌 등 자신의 한계를 체감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건이라면 한계상황으로 보아도 괜찮다.
4. 마무리하며
우리는 영화 〈공각기동대〉의 등장인물에 대한 실존적 해석을 통해 이들을 ‘인간다운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바탕으로 서두에서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다시 답해 보자. ‘고도로 발전한 안드로이드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복잡한 철학 용어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저 잠깐 깊게 생각해 보는 것 만으로도 철학적 사유와 가까워질 수 있다.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다."
자연과학대학 홍보기자단 자:몽 윤종환 기자 sparrow0927@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