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신임교수 인터뷰] 과학학과 현재환 교수님을 소개합니다!
자연대 학생기자단 자:몽 9기 | 박성준
*소속 : 학부대학 과학학과
*연구분야 : 동아시아 과학사,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 과학기술과 사회(STS)
*E-mail : jhwanhyun@snu.ac.kr
*Tel : 02-880-1492

과학학과 신임교수 현재환 교수님 (사진 =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홈페이지)
올해 9월 서울대학교 학부대학 과학학과에 부임하신 현재환 교수님은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와 동아시아 과학기술사를 연구하는 과학사학자이다. 인류유전학과 생태환경 연구 같은 과학이 민족 정체성, 국가 간 외교, 환경 거버넌스와 어떻게 얽혀 발전해 왔는지를 초국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학부 시절 품었던 '한민족의 유전체'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연구 여정부터 AI 시대의 기술결정론에 대한 성찰, 그리고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전하는 조언까지, 현재환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자리를 들여다보자.
1. 새로 부임하신 만큼 아직 교수님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교수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올해 9월부터 서울대학교 학부대학과 자연과학대학 과학학과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게 된 현재환입니다. 동아시아 과학기술사와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연구해 왔고,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도 공부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최근에는 환경인문학으로도 관심을 넓혀 가고 있어요.
한양대학교에서 역사, 철학, 과학기술학을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지금의 과학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일본 도쿄이과대학과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그 뒤 부산대학교에 임용되어 조교수와 부교수로 재직했고, 한양대학교에서 부교수로 지내다가 이번 학기에 관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 서울대학교에 부임하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석·박사 과정을 보냈고, 학자로서의 학문적 기틀을 세운 곳도 과학학과였습니다. 그래서 학문적 고향에 다시 돌아온 느낌이라 감회가 매우 새롭습니다. 또 다른 자연대 신임 교수님들과 달리 학부대학과 과학학과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어서, 학부생으로는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을, 대학원생으로는 과학학과 학생들을 함께 만나게 된다는 점도 뜻깊어요. 대학원생 시절 관악 캠퍼스에서 고민하고 공부했던 기억을 잘 되살려, 선배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고 학문적인 영감을 주고받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3. 교수님의 연구 분야와 앞으로 서울대학교에서 펼쳐 나가실 연구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많은 학생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 있지만 과학기술학, 즉 STS라는 학문 분야가 있습니다. 지금 자연대에도 STS 연계전공이 있고요.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과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과학기술과 사회가 만나는 수많은 접점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과학기술을 역사적으로 살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우리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앞으로 과학기술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해 어떤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지를 연구한다고 할 수 있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을 비롯한 근현대 동아시아의 독특한 사회·정치·문화적 맥락 속에서 생명과학과 환경과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연구합니다. 제 소개에는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초국적(transnational) 맥락'에서 연구한다고 되어 있는데요. 한국의 과학기술을 한국 안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지역의 과학자, 지식, 제도와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함께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인류유전학 같은 생명과학이나 생의학, 그리고 생태환경 과학이 한국 사회의 민족 정체성, 국가 간 외교 관계와 어떻게 얽혀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봤고, 이 가운데 인류 유전과 관련된 연구들을 다듬어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중서 『다민족 과학』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과학 디아스포라와 과학적 환경주의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 독일 등지에서 많은 한인 과학기술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 재외한인 과학기술자들은 모국과 거주국 양쪽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과학의 초국적 순환에 큰 역할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들이 두 사회를 오가며 과학기술을 매개한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출발점으로 소설『파친코』에도 등장하는 자이니치, 즉 재일한인 과학기술자들을 연구하기 위해 방학마다 일본을 방문해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환경인문학과 관련해서는 한국 생물학자들이 과학을 바탕으로 자연보전 제도와 거버넌스를 만들어 온 역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오늘날 '인류세'라고 불리는 시대의 복합위기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그리고 지금의 위기에 대응하려면 과학과 결합한 어떤 환경 거버넌스가 필요한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4. 연구 분야마다 연구 주제를 찾는 방식이 다를 것 같습니다. 과학사나 과학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다루는 연구에서는 연구 질문을 주로 어디에서 발견하시나요?
연구 주제나 계기에 따라 다르지만, 제 경험을 돌아보면 사회적인 상황이 연구 질문으로 이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20년 전후에 가장 열심히 했던 연구 중 하나가 아시아의 마스크 착용 역사에 관한 연구였어요. 당시 저는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에 있었는데, 독일 언론에서 '왜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은 마스크를 잘 쓰는가'라는 기사가 계속 나왔습니다. 독일이나 미국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 시위가 벌어지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기사들은 그 이유를 유교주의나 집단주의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올바른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은 종족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너무나 다르고, 위생용으로 마스크를 써 온 경험 자체도 다를 텐데요. 이를 '아시아인'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자 인종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스크의 역사는 지금까지 어떻게 연구되어 왔을까?'라는 질문을 갖고 자료를 살펴봤는데, 아시아 마스크에 대한 역사 연구가 별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특정 시기에만 연구가 집중되어 있고 마스크 역사의 전체 그림은 그려져 있지 않았죠. 그런 공백을 발견하면서 연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물론 저 혼자 풀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식민지기 한국의 마스크 착용 역사를 연구하는 한편 중국, 대만, 싱가포르, 일본, 독일의 연구자들과 함께 아시아 마스크 착용의 근현대사에 관한 국제 공동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많은 경우 이렇게 사회적인 상황과 연구가 연결되는 것 같아요. 학생들이 연구 주제를 잡는 것을 봐도 그 시대에 과학기술과 사회가 만나는 접점의 문제, 요즘이라면 AI에 가장 큰 관심을 갖습니다. 저 역시 학부 시절 유전체학을 둘러싼 사회윤리적 쟁점이 한창 논의되던 시점에 관심을 갖게 되어 대학원에 왔고요. 다른 과학 분야에 비해 조금 더 사회적 관심사에 보다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교수님께서 현재 전공 분야를 공부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학부에서 역사, 철학, 과학기술학을 전공하면서 생물학 서적을 많이 읽었고, 한국의 생물학 관련 뉴스도 주의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황우석 사태가 지나가고, 줄기세포 연구 대신 유전체 프로젝트들이 대안으로 떠오르던 시기였어요. 유전체 연구로 맞춤의학, 나아가 정밀의학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한국인 유전체 전장서열 분석 결과가 발표되면서 '한민족의 유전체를 해독했다', '네이처에 게재했다' 같은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역사 수업에서는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배웠어요. 한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고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생물학적으로 단일민족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저는 그 간극이 너무 흥미로웠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한민족의 유전체를 해독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그런 집단 범주는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문화적 배경과 과학적 이유로 쓰이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낳는 사회정치적 함의는 무엇인지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 질문이 제가 과학기술학과 과학기술사를 공부하게 된 출발점이었어요.
6. 올해 4월 출간하신 『다민족 과학』에서, 2000년대 다문화 사회가 강조되면서 유전학이 DNA 분석으로 단일민족 신화를 반박하고 이주민 건강을 위한 연구도 활발해졌지만, 그 과정에서 민족·종족 같은 단어가 인종과 혼재되어 쓰이며 오히려 한국인과 비한국인의 경계를 굳혀 왔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책을 쓰시게 된 문제의식이 궁금합니다.
학부 시절 품었던 그 질문을 대학원에 와서 조금씩 공부해 보니, 특히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는 맥락이 중요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고 과학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휴먼 게놈 프로젝트가 1차적으로 끝난 뒤 포스트 게놈 연구는 유전적 다형성, 즉 다양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동시에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한민족을 넘어 더 많은 집단을 포용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소위 '다문화 가족'이라 불렸던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유전학 연구가 국내에서 많이 이루어졌죠.
그 의도 자체는 포용적이었고 과학적인 근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민족 과학』에서 보여주었듯이, 그 결과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을 구별하고 한국인과 비한국인을 나누고 배제하는 '구별의 과학'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박사과정과 박사후연구원 시절을 거치며 다른 연구 주제들로도 관심을 넓혀 왔지만, 어떻게 보면 이 책은 학부생 때 가졌던 질문에 대해 제 나름대로 찾고 정리한 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7. 요즘 AI가 과학 연구에 큰 영향을 주고 있고, 연구자를 대체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과학사를 연구하며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해 오신 교수님께서는 AI가 과학 연구를 바꾸는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저도 최근 많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과학사나 과학기술학을 하는 입장에서 가장 문제 삼는 접근이 '기술결정론'이에요. 특정한 기술이 우리 사회를 전면적으로 바꾼다는 생각이죠. AI가 일자리를 전부 대체해 사회의 고용 시스템을 바꿀 것이라거나, AI가 과학자를 대체해 과학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대표적인 기술결정론입니다. 과학기술학과 과학기술사는 바로 이런 기술결정론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해 왔습니다. 겉보기에는 기술이 모든 것을 바꾼 것 같아도, 기술이 실제로 작동하고 사회를 바꾸려면 그에 맞는 다양한 사회적 변화가 함께 일어나야 하거든요.
물론 저도 충격을 받는 일이 많습니다. 최근 수학 문제와 관련해 주변 수학과 교수님들이 패닉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는 정말 다른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고민이 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기술결정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기술결정론이 가져오는 사회적·정치적 효과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AI 에이전트가 과학을 대체할 것'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가려지는 것이 있어요. AI는 스스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기업들이 있고, 기업들은 특정한 경쟁 구조 속에서 AI를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를 사회적으로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어요. 지금의 사회 구조나 과학계의 여러 시스템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AI를 발전시켜 나갈지 협상할 여지가 있는데, 기술이 알아서 발전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 마치 그런 여지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과학기술학과 과학기술사가 줄 수 있는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AI라는 기술도 결국 과학과 기술,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대체되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며 손을 놓아버리는 수동적이고 방관자적인 자세가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포함한 더 넓은 사회와 환경과도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더 포용적인, 보다 지속가능한 AI를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교수님과 같은 연구 분야로 진출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과학기술학이나 과학기술사를 전공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첫째, 자기 분야를 한정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텍스트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연과학대학 학생이라면 자기 분야의 과학 연구도 하고, 가능하다면 랩 경험도 최대한 많이 해 보세요.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과학 활동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철학적, 역사적인 글들도 꾸준히 함께 읽었으면 합니다.
둘째, 영어뿐 아니라 여러 언어를 익혔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과학기술사는 미국 중심, 서양 중심의 과학사를 문제 삼고 더 넓은 관점에서 과학기술의 형성을 살펴보는 '글로벌 히스토리'를 지향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양한 언어로 된 자료를 살피며 지역 간 상호작용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근현대 동아시아 맥락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본다면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같은 다국어 능력이 필요하죠.
셋째, 도전정신이 필요합니다. 학제간 분야이다 보니 본인이 정한 연구 주제가 선도 연구인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런 연구를 마친 뒤 그 업적을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공부를 마친 뒤에도 그 연구를 계속 이어 갈 수 있을지는 종종 불확실합니다. 요즘은 대학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어 모든 학문 분야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분야는 특히 학제간 분야라서 도전정신을 갖고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 학부 시절 역사학, 철학, 과학기술학을 함께 전공하셨는데요. 학부생 시절의 교수님은 어떤 학생이셨나요?
학부 시기를 생각하면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지금의 자유전공학부 같은 제도가 없었는데, 저 스스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공은 세 가지였지만 실제로 들은 수업은 훨씬 다양했어요. 법대 수업도 듣고, 생명과학과 수업도 듣고, 여러 과의 전공 과목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학문 분야마다 말할 수 있는 범위와 사유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역사학이나 생물학 하나만 공부했다면 정해진 학과 경계 안에서 공부하면 전문가가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여러 분야를 오가다 보니 그런 경계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것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고, 덕분에 대학원에서 과학기술학과 과학기술사라는 융합 학문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신 학과 생활은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생각해 보니 '자유'가 제 인생의 기치였던 것 같네요. 여행도 많이 다녔습니다. 학기 중에도 한 주씩은 스스로에게 자유의 시간을 주고 강원도까지 도보 여행을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가기도 했어요.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다는 마음으로, 해 보지 않은 경험을 계속 해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10. 이후 UCLA, 도쿄이과대학,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등 여러 나라에서 연구 경험을 쌓으셨는데요. 해외에서 연구하며 한국에 있을 때와 다르게 새로 깨닫거나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기관마다 달랐지만, 가장 컸던 것 중 하나는 언어였습니다. 해외에서 공부하기 위해 나름대로 영어와 일본어를 준비했지만, 막상 가 보니 한국의 대학에서 영어 수업을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수업이나 발표처럼 한국에서 배운 학술적인 영어는 할 수 있었지만, 세미나나 워크숍이 끝난 뒤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회적 상호작용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사람과 가까이서 눈을 맞추는 것조차 너무 어려웠어요. 그런 사소한 것부터가 큰 경험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운 것은 절대적인 표준 영어는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국내에서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영어인데, 국제학계에서 지내다 보면 미국 서부와 동부의 영어가 다르고, 영국에서도 맨체스터와 런던의 영어가 다릅니다. 유학생들의 영어도 저마다 다른 억양을 갖고 있고요. 영어에는 정말 많은 방식이 있으니 너무 주눅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일본에서는 같은 주제도 완전히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어요. 가까운 나라라서 오히려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관점과 문제의식으로 같은 주제를 다룰 수 있더라고요. 국제 연구소인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온 연구자들이 다양한 방법론으로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제시했습니다. 과학사는 절대적인 정답이 있는 학문이 아니거든요. 그곳에서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 접근을 이해하면서 내 연구의 자리를 어떻게 찾아갈지를 배웠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국에 있을 때는 미국 주요 대학의 과학사, 과학기술학 연구를 일종의 기준으로 여기고 그것을 최대한 따라 하거나 그만큼 잘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국제 경험을 하면서, 그런 연구들도 과거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주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 절대적인 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1.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럴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연구가 잘 안 풀리는 데에는 여러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논문을 투고했는데 리뷰가 매우 비판적으로 돌아오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연구 자료를 보며 세워 둔 가설이나 서사가 갑자기 튀어나온 새로운 자료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예요. 과학자들처럼 실험 결과가 곧바로 반증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제가 몰랐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제가 쓴 글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요. 이런 경우는 대개 제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분야를 다시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을 때는 잠시 관심을 다른 일로 돌리는 편이에요. 해당 주제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보거나, 예전에 쓰다 말았던 논문으로 돌아가 마무리하거나, 세미나나 워크숍을 준비합니다.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막혔던 문제가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정리되기도 하고, 동료들이 예기치 못하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쌓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연구를 하게 됩니다.
논문 심사평이 좋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에는 중립적인 마음으로 리뷰를 읽기 어렵기 때문에, 잠시 리뷰를 내려 두고 몇 주간 다른 일을 하며 머리를 식힙니다. 그런 다음 다시 돌아와 제 논문과 비판적인 리뷰를 함께 보면서 고쳐 나갈 부분을 찾아가요. 괴로운 순간은 늘 있지만, 다행히 '극복'이라고 할 만큼 큰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12. 과학사 연구와 사회문화적 분석, 저술 활동 등 다양한 길이 열려 있었을 것 같은데요. 교수의 길을 걷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마 '나는 교수가 될 거야'라고 생각해서 교수가 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연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 들어오기 전인데, 이곳에서 국제 동아시아 대학원생 STS 워크숍이 열렸고 학부생도 참가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제 나름대로 주제를 탐색해 소논문을 쓰고 발표했습니다. 제가 준비한 내용과 제가 만들어 낸 주장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면서,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학문적 관심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며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순간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때 '나는 연구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도 저에게는 연구자라는 정체성만 있었습니다. 다만 박사학위를 받을 즈음, 연구를 계속하려면 어쨌든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운 좋게 부산대학교에 임용되어 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부산대와 한양대를 거쳐 교수 생활을 한 지 6년 반째가 되었네요.
교수로 지내면서 연구자 외에 교육자라는 정체성이 새로 생겼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문제 삼고 싶은 주제를 학문 공동체의 동료들과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정리해 학생들과 대화하는 일도 있죠. 예를 들어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과학 연구를 성찰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교육자가 되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금은 교수라는 직업을 연구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해 나가고 있습니다.
13.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학부생 시절로 돌아가 보면, 진로를 하나로 딱 정하면 모든 것이 결정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제 삶을 돌아보면 일직선으로 계획된 것은 없었습니다. 지금 거꾸로 보면 매끄러운 길처럼 보이지만, 그런 길은 사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정말 다양한 일을 하게 됩니다. 저도 과학기술정책연구소에서 짧게나마 일한 적이 있고, 석사 때는 현대 STS 이슈에 관심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식민지기 의학사나 냉전기 환경사 같은 역사 연구를 하게 됐어요. 연구하는 공간도, 하는 일도 계속 변했고, 예상치 못한 기회는 오히려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됐습니다. 그러니 길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너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을 봐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패를 많이 하는 학생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 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제적으로 중요하고, 자료도 많고, 나중에 사회적인 스포트라이트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주제를 찾는 학생들은 오히려 졸업을 못 하거나 잘 풀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반대로 자기가 매력을 느끼는 문제에 깊이 몰입한 사람들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잘 성취했습니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경험이나 관심사도 나중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앞서 도보 여행과 자전거 여행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거의 무전여행 수준으로 자전거를 타고 일본 규슈를 처음 여행했어요. 그때 겪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나중에 동아시아 과학기술사를 연구하게 된 큰 학문 외적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남들이 정해 놓은 안전한 경로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질문과 호기심, 관심에 스스로를 최대한 열어 두고 과감하게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14.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실험실에서든, 실험실이 필요 없는 전공에서든, 자연과학 지식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일은 그 자체로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인류가 만들어 내는 가장 경이로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 과정에서 가끔은 잠시 멈춰 서서, 내가 하는 과학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 사회와 환경, 그리고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과학기술학과 과학기술사는 과학이 진공 상태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과학은 항상 사회, 윤리, 그리고 우리 시대의 정의 문제와 얽혀 있어요. 그 정도는 분야나 주제에 따라 다르지만 그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여러분이 자연과학에 대한 깊은 전문성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성찰까지 겸비한 따뜻한 과학자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과학학과와 학부대학의 강의실, 그리고 캠퍼스 곳곳에서 자주 만나 정답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자연과학대학 학생기자단 자:몽 박성준 기자 imsjpark26@snu.ac.kr
카드뉴스는 자:몽 인스타그램 @grapefruit_snucn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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